온전한 예배의 회복을 갈망하며 예배 무용 예술가 실레스터 스노우버(Celeste Snowber)는 “몸으로 드리는 기도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. “육체가 갈망하며, 호흡이 찬양할 수 있으며 내장이 생각할 수 있으며, 간이 애통할 수 있고 뼈가 선포하고 기뻐하며 전율할 수 있다.”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?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. 예레미야는 고백하며 한탄하기를 “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”(렘애2:11)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. 다윗은 애통하며 간구하기를 “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자 누구리요”(시35:10), 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. 기도가 그렇게 간절하다면 “예배”는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? 성도가 우리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운 헌신이 바로 예배입니다.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예배라고 저는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. 이것은 저의 가르침 이전에 성경적 요청이고 신학적 중요한 원리입니다. 그렇습니다! 기독교는 몸의 종교입니다.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바로 대표적인 실례입니다. 예수님은 이 땅에 몸을 입고 역사의 현장에 오셨습니다. 더 이상 말을 보탤 필요가 없어집니다. 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예수께서 친히 육신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. 요한복음1:14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. “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”
그런데 왜 우리는 몸을 드리는 일을 외면하고, 촉각과 행함을 중요시하지 않게 되었을까요? 이길용 교수는 이렇게 진단하였습니다. “우리는 이성 중심주의가 판을 치는 바람에 우리는 이해하고, 인식하고, 분별하고, 해석해 내는 것이 인간다움의 정수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. 그래서 논리가 앞서고, 설명이 주를 이루고, 분석이 중심을 차지했다. 이런 경험은 종교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. 종교, 신앙이라는 것도 사실은 ‘공부’하고 ‘연구’하는 것으로 신앙을 ‘이해’하려 한다. 그리고 그 사이 점차 우리는 몸의 이야기와 논리를 받아들이는 일에 미숙한 존재가 되어 갔다.” 시인은 하나님의 얼마나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고 갈망하였는지 이렇게 노래하며 간구하였습니다. “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(시84:1~2)” 아직도 우리는 예배중에 마스크를 착용하고,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하는 아직도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. 자유스럽게 마음껏 찬양하고, 아멘을 외치며 거리낌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함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체험하는 시간들입니다. 한 부분씩 예배가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에 오늘부터 오후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. 사랑하는 성도님들, 함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하며, 예배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계속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. 할렐루야!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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